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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음식에 담긴 조상의 지혜와 과학

설날 음식에 담긴 조상의 지혜와 과학

물질이 풍부한 지금은 설날에 대한 아이들의 설렘이 반감되었지만, 옛날 우리가 어릴 적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즐겁다. 설날 아침 차례 상에 오른 맛난 음식들을 볼 때마다 매일같이 설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약과와 유과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르고, 평소에는 먹기 힘든 산적과 조기는 참으로 별맛이었다. 몇 날을 두고 먹어야 할 떡국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가을 산천에 널린 밤과 대추 역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상에 올린 통문어는 겁이 났다. 귀한 음식이라 먹고는 싶었지만 그 큰 빨판이 목에 붙어 안 떨어지면 어쩌나,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차례 음식은 정성

정성스럽게 마련한 차례 상을 보면 우리 조상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후손들이 차례 상에 올리는 음식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 지방에서는 구하기 힘들어 흔히 접할 수 없는 귀한 음식이 첫 번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조상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그 지방의 토속 음식일 것이다.

“조상님께 올리는 음식은 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기존 세대와 차례 음식을 돈으로 장만하는 데 별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일부 신세대 간의 차이랄까, 아무튼 요즘의 세태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 조상은 음식의 양이나 질보다 그 음식에 담긴 정성에 더욱 흐뭇해하실 텐데 말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제수나 차례 음식을 장만하는 정성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지극했다. 먼 바다에서 온 것은 물론 봄여름의 나물과 가을철 과일도 잘 갈무리해두었다가 영양과 균형이 잡힌 멋진 상차림으로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자손들의 건승을 빌었다.

 

떡국의 의미

설음식들을 살펴보자. 가정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떡국이다. 떡국은 흰색으로, 이는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조상을 대하려는 다짐과 더불어 자손의 무병장수와 재복을 바라는 염원에서 새해 첫날 조상에게 올리는 첫 음식이다. 또 매년 설에 첫 떡국을 먹을 때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고 여겼는데, 그런 의미에서 설날 먹는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도 불렀다.

떡국에 관한 일화 가운데 그 유명한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 쓰기와 그의 어머니의 떡 썰기 대결에 관한 일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상을 기리며 떡을 써는 어머니의 정성은 불을 꺼도 변함이 없었지만 (주변 상황이 바뀜에 따라 흐트러지는) 한석봉의 글씨에는 이른바 정성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공부 또한 조상을 대하듯이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큰 의미를 전해준다.

 

조상의 패스트푸드 떡국

정성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 생각해도 우리 조상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설날에는 웃어른에게 세배를 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기 때문에 그때마다 밥을 지어 대접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밥이 있으면 국이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반찬은 필수다. 게다가 상차림 또한 번거로워 찾아오는 손님마다 식사를 대접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터. 여기에서 우리 조상의 지혜가 번쩍인다. 패스트푸드, 다시 말해 즉석 간편식은 우리나라에서도 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어왔다. 수십 명의 손님이 한꺼번에 들이닥쳐도 겁낼 것 없다. 미리 썰어놓은 떡을 미리 우려낸 고기 국물에 넣고 끌이기만 하면 된다. 떡국에 들어가는 만두도 그렇고 김과 달걀지단 등의 고명도 다 준비되어 있어 나중에 위에 올리기만 하면 되며, 반찬은 김치 한두 종류와 간장 한 종지면 오케이니 이 얼마나 훌륭한 명품 가공식품인가. 먹기 쉽고 적게 먹어도 든든하며, 만들기도 간단한 떡국이야말로 우리 조상의 지혜가 담긴 설음식 중 으뜸이라 하겠다.

 

산적

산적(散炙)은 소고기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한 후 꼬챙이에 꿰어 일정 시간 용기에 담아 재워두었다가 먹기 전에 숯불에 구운 것으로, 고기에 밴 양념 맛과 살짝 익힌 고기 맛이 조화를 이뤄 우리 조상이 즐겨 먹었던 식품이다. 산적은 옛날 맥적(貊炙)이라고도 불렸는데, 맥이란 바로 고구려를 일컫는 것으로 대대로 내려온 우리 조상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홍어

또 홍어는 어떤가? 전라도 지방의 손님 접대 음식으로 발효를 통한 저장 과학과 소화를 촉진시켜주는 숙성 홍어를 개발해낸 우리 조상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알칼리성 식품인 홍어는 자체에 있는 암모니아 성질을 이용해 자연 발효시키면 더 강한 암모니아를 생성, pH 9의 강알칼리로 부패균의 침입을 막아 저장 기간을 늘릴 뿐만 아니라 소화 기능을 높이고 술독을 없애주기 때문에 자칫 과식과 과음하기 쉬운 설날의 이상적인 음식으로 안성맞춤이다.

 

생선

경상도의 설음식 장만도 과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400여 년 전 안동의 정부인 장씨(貞夫人 長氏)가 쓴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이란 책을 보면 생선을 저장하는 방법이 독특한 것을 알 수 있다. 안동은 내륙 지방이라 바다 생선을 설까지 저장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생선의 내장과 핏기를 없애고 소금을 친 다음 발에 널어 적당히 건조시키는데, 이때 발 밑에 불을 피워 연기를 쐰 후 작은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설까지 저장하였다. 요즘 생선 훈제 요리의 원조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우리 조상은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설음식은 대부분 우리 조상이 오랜 세월 동안 머리를 짜내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한 최고의 과학 음식이다. 현대 식품과학에서도 감탄하는 우리의 전통 음식을 후손인 우리들이 멀리하고 외국 음식만 찾는다면, 우리 음식에 깃든 조상의 혼과 정성을 외면하는 불효를 범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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